최근호

가정과삶의질연구(Journal of Families and Better Life) - Vol. 42 , No. 1

[ Article ]
Journal of Families and Better Life - Vol. 40, No. 3, pp. 1-16
Abbreviation: JKHMAJFBL
ISSN: 2765-1932 (Print) 2765-2432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30 Sep 2022
Received 16 Jun 2022 Revised 07 Aug 2022 Accepted 07 Sep 2022
DOI: https://doi.org/10.7466/JFBL.2022.40.3.1

코로나를 계기로 자녀 ‘최선의 이익’을 고민한 경험에 관한 자문화기술지
김호현*

Autoethnography on Experience of Concerning over the “Best Interests” of My Daugther in the Wake of COVID-19
Kim, Hohyun*
Department of Early Childhood Education, Gwangju University, Assistant Professor
Correspondence to : *Hohyun Kim, Department of Early Childhood Education, Gwangju University. 277 Hyodukro, Namgu, Gwangju 61743, Rep. of Korea. Tel: +82-62-670-2317, E-mail: khh@gwang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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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이 글은 코로나를 계기로 내 아이의 최상의 이익을 고민하기 시작한 연구자가 무엇을 알게 되었고, 성찰하였는지, 나아가 권리담론을 이해하고, 권리를 실천하는 일의 의미를 찾고자 시도했다. 아동 최선의 이익과 관련된 세 가지 이슈인 부모와 자녀 요구 사이의 적정선 찾기, 최선의 이익 파악하기, 최선에 관한 부부의 의견충돌 해소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누구나 겪을 일상 사례를 중심으로 보여주었다. 이 글은 나의 깨달음을 담고 있는 자서전이자 우리 가족의 양육 문화를 보여주기에 문화기술적 특성을 지니므로 연구방법으로 자문화기술지를 선정하였다. 자료는 나와 아내가 수시로 기록하는 일상 노트와 메모,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과거의 영상과 사진을 보며 아내와 나눈 대화를 기록한 노트이고, 이것을 함께 보면서 감정회상, 협력적 기억회상, 생각 고백 과정을 거치며 자유로운 글쓰기를 하였다. 아동 최상의 이익은 최선을 찾아야 한다는 요구가 아니라 최선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 부모는 마땅히 큰 부담과 의무를 질 것, 부모의 시간과 노력이 쓰이는만큼 아이는 하루하루 충만한 자유와 행복이 겹겹이 쌓일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Abstract

This article attempted to understand the discourse of rights and practicing rights by understanding what the researcher, who began to think about the best interests of his child, learned and reflected on in the wake of COVID-19. It shows the process of finding the proper line between parents and a child’s needs, identifying the best interests of the child, and resolving disagreements parents had on the best interests of their child by focusing on daily life experiences that any parents experience. This article is an autobiography containing my enlightenment and ethnographic character that shows the culture of raising a child in my family, so I selected autoethnography as a research method. The data consisted of daily notes and memos that my wife and I frequently recorded, videos and photos of daily life, and recorded conversations with my wife. I wrote freely through emotional recall, cooperative memory recall, and theoretical confession. It was discovered that “the best interests of the child” actually means attempting to do what’s best for the child while carrying a heavy load and obligation to do so. It will lead children to freedom and happiness as parents spend time and efforts in order to find the best interests of the child.


Keywords: autoethnography, children’s rights, the best interests of the child, COVID-19
키워드: 자문화기술지, 아동권리, 아동 최선의 이익, 코로나

I. 이야기의 시작

우리 아이는 일곱 살 인생의 절반 가까이 코로나와 함께했다. 지금이야 위드 코로나가 정착되었지만 2020년 초부터 줄곧 집에서, 밖에서는 마스크를 쓴 채 보냈다. 부모의 맘이란 아이가 빗물에 젖어도 아파져 오는 것이어서 아이는 별생각이 없었을지언정 온종일 집안에서 그것도 웃으며 돌아다니는 모습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아이가 집 안에서 뛰기라도 하면 제발 걷자고 구슬리고 타이르는 아파트 14층 주민으로서의 한이 가슴을 후벼 파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 중에도 꽃은 피듯, 누군가에게는 죄송스럽지만, 코로나 덕에 우리 가족은 8개월 동안 떨어지지 않고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이 글이 시작될 수 있었다.

취업을 한 2018년부터 지금껏 매주 동과 서를 오가던 와중에 비대면 수업이 시작되며 우리는 보통의 가족처럼 한동안 함께 지낼 수 있었다. 그 덕에 아이와의 관계가 전에 없이 돈독해진 한편 자연스레 새로이 만들어진 집안 규칙에 적응하느라 아내와 다투었고, 아이와도 부딪혔다. 이유는 코로나 동안 많은 이들이 겪었듯 건강 걱정, 육아, 관계 단절, 요리 등으로 인한 소진과 육아 스트레스였다(Chu et al., 2021; Lee et al., 2021; Marchetti et al., 2020; Miller et al., 2022; Taubman–Ben-Ari et al., 2021). 아내와 다툰 이유야 이것 말고도 수백 가지를 들 수 있지만 다툼의 중심에 아이가 있었던 경우만 떠올려보면 역시 양육방식의 관점이 다른 데 있었다. 우리 둘 사이에는 양육 기준이 필요했고, 아이와도 그랬다. 주택에 마당이 있던 한적한 시골의 주택 생활에 익숙해 있던 아이는 아파트 생활 규칙에 적응해야 했다. 살살 걷기, 공 튀기지 않기, 큰소리 내지 않기. 아파트 생활의 기본 규칙은 친구도 없는 이곳에서 자유가 박탈당한 답답함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살살 걸어야지’, ‘작게 말하자’, ‘맨 바닥에서 그거 끌면 안 돼’를 석 달 동안 남발하다 이것은 아이 사는 게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아이와 놀이터로 나갔고, 밤마다 산책로를 걷고 뛰었다. 단조로운 아파트 놀이터가 지겨워지면 걸어서, 차로 다른 아파트 놀이터에 가서 놀았다. 이것이 이 시간 동안 아이에게 최선이라 생각되는 것들이었다. 아이는 원하는 것들을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고, 그것에 응할 사람은 엄마, 아빠밖에 없었다. 이곳에는 친구가 없었고, 놀이터에서 우연히 만난 또래와 일회성으로 이루어지는 접촉도 막혀있었다. 나와 아내가 아이의 친구였고, 아이의 삶을 채워줄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아이 삶의 풍요와 빈곤이 어른의 결정에 달려있음(김호현, 2017)을 떠올려보면 그때만큼 아이에게는 우리 부부가 전부였다. 코로나는 우리 가족을 짧게나마 함께 머물게 했고, 아이에게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 나누게 하였다. 그전에는 이런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겠냐만 코로나 경험 덕에 우리 가족과는 상관없을 것 같던 죽음에 눈이 떠졌고(김지수, 이어령, 2021), 재난 상황에서 약자들의 삶이 더욱 취약해질 수밖에 없음(김승섭, 2017)을 느끼며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전보다 더 진지하게 아내와 나누게 되었다. 권리를 공부하고 있던 나에게도 권리에 관하여 더 진지하게 고민할 기회가 되었다.

그동안 권리를 공부하며 알게 된 것이 몇 가지 있다. 권리는 듣기 좋은 그럴싸한 레토릭(Lyon & Olson, 2011)이 아닌 현실의 삶을 담고 있다는 점(Jones & Walker, 2011)에서 잠재태이며, 이미 행위로 실천 중인 현실태라는 점이다. 그리고 권리는 권력관계 아래의 이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로 출발했지만 아래의 이는 우위의 이의 횡포에 당할 위치에 여전히 놓여 있다는 점, 횡포까지는 아니라도 언제나 우위의 이들의 의사결정에서 배제될 가능성 앞에 놓여있다는 점이다. 우리 부부는 언제나 우위에서 아이의 안위를 함부로 결정하고 실행할 잠재태와 현실태를 오가고 있음을, 그래서 유아에게 아동 최선의 이익은 매우 특별한 원칙임을 다시 한번 상기하였다. 아이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에도 아동 최선의 이익 원칙이 작동되어야 하지만 아파트 생활 규칙이 앞설 때, 감정 상한 부부가 아이 앞에서 다툴 때, 밖으로 나가기 귀찮아 걸어 다니라는 말만 반복할 때 그 원칙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때는 다시 작동시킬 여지는 있다. 다툼을 참고, 귀찮음을 이겨내면 되니까. 그러나 권리문제는 언제나 풀기 어려운 숙제이다. 부모의 최선과 아이의 최선이 부딪힐 때, 부모의 최선이 정말 최선이었는지 알 도리가 없을 때, 남편의 최선과 아내의 최선이 다를 때 답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아동 최선의 이익이 낳은 이 세 가지 이슈는 정답이 없는 다리를 숙고하고, 고민하며 건너게, 건너지 못하게 혹은 건넜다는 믿음만을 가지게 만든다. 따라서 아동 최선의 이익을 고민하는 과정은 아이를 위한 최선의 결정을 해나가는 의사결정의 과정(Zermatten, 2010)이며, 그 과정을 짚어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 글은 코로나를 계기로 내 아이의 최상의 이익을 고민하기 시작한 연구자가 그간 내 아이를 위해 했던 결정들이 최상의 이익이었는지를 분석하고, 분석의 과정에서 권리 전반과 권리 중심 육아에 관하여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 성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연구의 목적은 구체적으로 개인적, 사회적, 연구적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개인적 측면에서 이 연구는 ‘권리를 공부하는 넌 그것을 얼마나 잘 실천하고 판단하고 있느냐’라는 질문을 마주하게 했고,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을 반성하고, 깨닫고, 영감을 얻기 위해서 이루어졌다(Douglass & Moustakas, 1985). 또 개인적으로 그동안 공부해온 권리 담론이 누군가에게는 체제안정을 위한 가용자원 정도로 여겨진다거나, ‘거짓말하지 말라’와 같은 도덕규범 정도로 여겨질지언정(정정훈, 2014) 적어도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나는 평등, 존엄, 자유의 가치가 현실에서 실천되기 위해서는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고, 그만큼 내가 감수해야 할 불편도 커진다는 것을 다시 상기할 수 있었다. 사회적 측면에서 이 연구는 연구자가 추상성이 짙은 개념인 권리와 아동 최선의 이익을 실천하는 모습을 드러내어 부모 일반에게 자녀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어떤 의사결정 과정이 필요한지 보여주고자 하였다. 부모들은 언제나 자녀의 권리 보장과 침해의 경계에 서서 언제나 이쪽을 향하려 노력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저쪽으로 갈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연구적 측면에서 아동 최선의 이익을 다룬 연구는 주로 판결과 관련된 것인데 가족 안 누구나 겪는 일상에서 그것을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을 부족하나마 알리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코로나로 인해 침해되는 아동 권리에 관한 글이 아니라 아이와 떨어져 살던 연구자가 코로나 덕에 함께 살게 되면서 그간 자녀 최선의 이익을 위하여 어떤 고민을 해왔는지 반성하는 글임을 밝힌다.


Ⅱ. 아동 최선의 이익

유엔아동권리협약 3조와 12조는 아동 최선의 이익과 그와 관련된 중요한 개념을 담고 있는 세트 조항이다. 협약 3조 1항은 ‘공공⋅민간 사회복지기관, 법원, 행정당국, 입법기관 등은 아동과 관련된 활동을 함에 있어 아동에게 최선의 이익이 무엇인지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한다’라며 아동 최선의 이익을 언급하고 있다. 12조 1항은 ‘자신의 의견을 형성할 능력을 갖춘 아동에게는 본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표현할 권리를 보장하고, 아동의 나이와 성숙도에 따라 그 의견에 적절한 비중을 부여해야 한다’라고 서술한다. 아동권리위원회에서 이 세트 조항을 구체적으로 해석한 일반논평 7의 13조를 요약하면 ‘부모는 아동의 돌봄, 건강, 교육, 환경, 거주, 이동, 보건서비스, 학교 등의 지원⋅조치 등 아동의 안녕에 관한 모든 의사결정에서 최선의 이익을 고려해야 하는데 그들의 진화하는 능력(evolving capacity)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세트 조항을 엮어서 살펴보면 나이가 어린 아이일수록 자기 권리를 스스로 지킬 능력이 부족하니 부모가 대신 판단해줄 일이 많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 능력이 향상될 터이니 부모는 점차 판단을 아이에게 맡겨 나가고, 아이의 결정에 점차 더 비중을 두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능력이란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의 진위를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이성적 자율성을 의미한다(김호현, 2017). 또 3조에 따르면 아동 최선의 이익을 행하는 당사자에서 부모가 제외된 것처럼 보이지만 협약 5조는 부모는 적절한 감독과 지도할 책임을 지고 있고, 18조는 ‘아동 최선의 이익이 부모의 기본적 관심이 된다’고 명시함으로써 아동 최선의 이익은 국가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부모들도 실천해야 하는 원칙임을 알 수 있다. 협약은 부모에게 자녀의 권리를 보장해야만 하는 의무를 발생시켜 자녀가 어릴수록 부모가 대신 결정하고 판단할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문제는 자신의 상황을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아이가 충분히 성숙해야만 의견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오해이다. 협약에서 아이의 판단과 결정 능력을 강조함으로써 마치 그 능력이 부족할 정도로 어릴수록 어른이 아이 대신 판단해야 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진화하는 능력의 본의는 현재의 능력에 초점을 두지 않고 발달할 미래의 능력을 고려하고, 미래에 능력이 잘 발달할 수 있도록 현재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김호현, 2017). 그 시작이 아이가 언어를 말하기 전 울음, 표정, 제스쳐 등 온몸으로 표현하는 의사에 집중하는 것부터이다. 따라서 12조는 의견 수용의 정도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온몸으로 표현하는 의견에 귀를 기울이라는 청문의 의미도 있다(이성옥, 이순형, 2015). 청문을 포함한 의견 경청을 통해 아이에게 귀를 기울여 아이의 의사를 파악하는 일은 부모가 아동 최선의 이익을 판단하는데 이르기까지 안내하는 역할을 하므로 매우 중요한 정보가 된다(Archard & Skivenes, 2009).

최선의 이익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중요하게 삼는 것이 3중 개념(threefold concept)이다. 우선 실체적 권리(substantive right) 요소는 아동을 위한 결정을 할 때 여러 이익들 중 아동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것이 제1고려사항이 되어야 하고 채택되어야 함을 명한다. 해석상의 기본적 법리(interpretive principle)는 법조문이 하나 이상의 의미로 해석될 경우, 아동 최선의 이익에 가장 효과적으로 부합하는 해석이 선택되어야 함을 뜻한다. 난민 아동의 경우처럼 아동의 권리를 최우선에 두어야 하는 상황이나 한 아동의 두 권리가 충돌하는 상황에 적용될 수 있다(Sormunen, 2020). 마지막으로 절차규칙(rule of procedure)은 최선의 이익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아동에게 미칠 결정의 결과를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은 아동 최선의 이익의 상황별 규명, 평가의 기준, 다른 이의 권리를 넘어서 그 아이의 이익에 더 큰 비중을 두게 된 근거를 설명할 의무를 부여한다(Sormunen, 2020).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3중 개념을 토대로 아동에게 최선이라 생각되는 결과가 나오기까지 숙고의 과정을 거쳤느냐이다(Sormunen, 2020). 그러나 이 3요소를 바탕으로 결론을 내리는 일은 쉽지 않다. 가장 큰 이익이 무엇이냐, 법조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결과를 어떻게 예측하느냐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넘어서기 어려운 이유는 아이와 관련된 모든 이슈를 알아야 하고, 경우의 수별로 결과를 예측해야 하는 문제, 누가 무엇을 토대로 판단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데 있다(Archard & Skivenes, 2009; Parker, 1994). 한 아동에게 최선의 이익이 무엇인지 통일된 합의를 도출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아이와 환경에서 얻은 최대한 많은 정보를 바탕으로 오랜 시간 숙고하여 결과를 바르게 예측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모의 판단이 언제나 정확하지 않다는 문제와 이어진다. 그래서 몇 가지 이슈가 발생한다. 첫째, 아동의 능력과 부모의 판단 사이의 적정선은 어디인가하는 점이다. 이 점은 부모는 어디까지 개입하고 어디까지 물러날 것인가, 부모의 판단이 자녀의 요구와 크게 어긋나는 경우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아이의 의견을 어디까지 수용할 것인가와 같은 질문을 도출한다. 한 대법원판사의 언급대로 ‘아동최선의 이익은 그 기준이 없기에 힘을 가진 의사결정자의 가치체계에 달려있다(Parker, 1994. p. 26).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조항 자체가 의무 당사자를 명시하고 있지만 어떤 의무를, 어떻게 해결할지에 관한 개요를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김호현, 2020; Zermatten, 2010). 이 점은 권위적 간섭주의(paternalism) 논의를 불러일으킨다. 둘째, 아동에게 무엇이 최선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법정판결 예시로 다섯 살 아이가 이혼한 부모 중 누구와 살지가 서류, 가족과 전문가 증언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판사의 판단에 맡겨지는 셈이다. 아이는 어머니와 살고 싶다지만 아이의 나이가 어리다면 판사는 그 의견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아도 된다(Archard & Skivenes, 2009). 이것이 정당한가의 문제가 남는데 이 문제를 어떤 근거로 해결할 수 있을까. 셋째, 양육자 간 최선의 이익을 두고 의견충돌이 일어날 때 누구의 생각에 손을 들 것인가. 이 말은 아동에게 최선인 것이 무엇인지는 부모가 살아온 문화, 경험, 신념이 섞인 결과에 달려있다는 의미이며, 문화에 따라 달리 해석되고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Parker, 1994).

지금껏 국내외에서 아동 최선의 이익을 다룬 논문은 무엇이 최선인가에 관한 기준을 고민한 연구(Strømland et al., 2019), 용어 분석 및 개념의 타당성 분석(Eekelaar, 2020; Zermatten, 2010), 용어 해석의 어려움을 살펴본 연구(Daly, 2018; Parker, 1994), 아동 최선의 이익과 아동 관점의 균형을 찾기 위한 법정사례, 원리, 면담 분석(송영민, 2017; 이기범, 2018; Archard, D. & Skivenes, 2009; Eekelaar, 2015; Helland, 2021; Thomas, & O’Kane, 1998)이 있다. 주로 최선의 기준, 용어, 원리, 법정사례를 검토한 선행 연구는 이 논문에서 연구자가 육아를 할 때 내린 결정이 자녀 최선의 이익에 부합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나 원리로 활용이 되었다. 그러나 아동 최선의 이익을 양육 상황에 적용한 선행연구는 전무하다. 이 연구는 개념으로서의 아동 최선의 이익을 분석한 선행연구와는 달리 해당 개념을 현실의 육아 사례에 적용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아동 최선의 이익과 관련된 세 가지 이슈인 부모개인과 자녀 요구 사이의 적정선 찾기, 최선의 이익 파악하기, 최선에 관한 의견충돌 해소는 우리 가족에게도 일어났다. 이 연구에서는 이 세 가지 문제를 해소하는 과정을 누구나 겪을 일상 사례를 중심으로 분석함으로써 아동 최선의 이익을 찾는 과정을 보여준다.


Ⅲ. 연구방법
1. 자문화기술지

자문화기술지(autoethnography)는 자신에 관한 쓰기인 자서전(autobiography)과 문화 경험에 관한 쓰기인 문화기술지(ethnography)의 특성을 아우르는 질적연구방법론이다(Adams et al., 2017. pp. 2-3). 자서전은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되내이며 기쁨, 슬픔의 감정을 드라마 형식으로 드러내는 내러티브식 글쓰기이고, 문화기술지는 특정 문화가 작동하는 방식과 그 방식이 문화 속 개인들의 삶을 조정하는 과정을 그린다. 둘 모두 독자들을 외부자로서 저자의 삶을 함께 살아내게 하는 연구방법론이다. 즉 자문화기술지는 사회 문맥과 문화적 틀 안에서, 타인과의 관계와 화자의 체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해나가는 지극히 개인에 중점을 두는 질적연구이다(Smith, 2017).

자문화기술지를 방법론으로 활용하는 목적은 크게 세 가지이다(Adams et al., 2017). 첫째, 연구자가 사회⋅문화 맥락 안에서 기존 문화를 재해석하거나, 새로운 인식을 만들어내고 깨달음을 얻는 체험에 중점을 두기 위해, 둘째, 연구자 본인이 체험한 동네⋅기관⋅학교⋅가족⋅퀴어 문화, 인종차별 문화 안에서 경험한 이야기를 내부자 관점에서 알리기 위해, 셋째, 연구자가 관찰하고, 결론으로 도달하는 과정을 제시함으로써 외부인에게 타문화를 이해시키거나 타문화의 선입견에 대항하기 위해서이다. 이 논문은 첫 번째 목적에 해당하는 우리 가족 문화 속에서 삶을 되짚어보고, 권리의 관점에서 육아를 이해하면서 권리 중심 육아에 관한 새로운 인식과 깨달음을 얻는 체험에 초점을 두었다. 주말 가족으로 지냈던 연구자인 내가 코로나로 8개월을 아내, 아이와 함께 살게 되면서 아이가 태어난 후 그때껏 아이의 최선의 이익을 생각하는 아빠였는지를 반성하는 글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나와 아내의 양육 방식, 내가 아이와 아이의 놀이를 대하는 태도가 아동 최선의 이익과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의 사례를 토대로 3중 개념 등을 기준으로 분석하고, 권리에 관하여 새롭게 깨달은 바를 서술하였다.

2. 자료수집 및 분석

자문화기술지는 자기성찰이 핵심이고, 이를 위해 과거 기억을 끄집어내어야 한다. 논문에 사용된 자료는 나와 아내가 평소에 수시로 기록하는 노트와 메모,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영상과 사진을 보며 아내와 대화를 나눈 뒤 기록한 노트이다. 아내와 나의 노트와 메모는 처음부터 이 연구를 위해 수집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상에서 독서하다, 드라마를 보다, 논문을 읽다, 아이와 놀다가도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바로 메모를 해왔고, 아내는 그날 일어난 사건과 그때의 감정을 매일 짧은 일기로 기록해왔다. 이 기록들은 1∼2년 전의 사건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었다. 특히 이 연구에 적합한 사례를 찾고, 그때의 감정과 더 선명한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많은 메모와 일기, 사진과 영상을 뒤졌다. 사례는 일상에서 여느 가족이 겪을만한 사소한 것으로 선택되었다. 이 사례들을 바탕으로 감정 회상(emotional recall)을 시도했다. 감정 회상은 자료들을 보며 그때의 장소로 돌아가 그때의 감정을 느껴보는 방식인데 감정을 떠올리면 다른 세부 사항이 함께 떠오르기도 하고, 새로운 질문이 도출될 수도 있다(Ellis, 1999). 이 사례들을 아내와 함께 읽으며 그때의 사건과 감정을 나누는 협력적 기억회상 과정을 거쳤고, 각 사례가 아이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문제가 있는지 각자의 관점을 펼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과정을 통해 사건을 보는 각자의 주관성이 교차하며 지난 사건들을 풍부하게 떠올리고 다각도에서 해석할 수 있었다(Chang et al., 2013).

연구와 관련된 사례를 찾아 아내와 함께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연구에 공개적으로 담아낼 수 있도록 글쓰기는 나의 경험, 숙고 과정, 에피소드 등을 고백하듯 소상하게 밝히는 식의 생각 고백(confession)(Van Maanen, 2011)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이 연구는 인간의 체험을 분절할 수 없다는 기조를 바탕으로 자료를 범주화하여 분류하는 방식의 코딩을 하지 않았다. 대신 연구결과에는 아동 최선의 이익과 관련된 세 가지 이슈, 부모와 자녀 요구 사이의 적정선 찾기, 최선의 이익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최선의 이익을 두고 아내와 남편 사이에 일어난 의견 충돌을 꼭지로 삼고, 관련 사례를 꼭지별로 배치한 뒤 감정 회상, 협력적 기억회상, 생각 고백 방식을 포함한 분석적 글쓰기가 이루어졌다. 전반적 글쓰기는 자문화기술지답게 형식적인 논문식 글쓰기보다는 매우 자유로운 방식으로 진행되었다(Ellis & Bochner, 2000).


Ⅳ. 자녀 최선의 이익을 찾아서
1. 나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로 이 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나와 아내가 아이를 사이에 두고 결정했던 일들이 아동 최선의 이익이었는지 고민하고 분석하기를 마음먹기까지의 심정을 담기 위해서이다. 나는 유아교육을 전공했고, 관련 분야에서 일하고 있지만 육아에서는 매우 평범한 아빠이다. 어떤 노력으로도 평범함을 비범함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반성과 반성 후의 실천이 쌓이면 평범함이 유능함 정도까지는 탈바꿈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유능한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배우고,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에 이르기까지 마음먹기가 쉽지 않다. 오래 담아두었으나 나 역시 하루아침에 마음을 먹을 수는 없었다. 코로나 이전까지는. 여기에서는 코로나를 거치며 내가 무엇을 경험했고, 어떤 변화가 일었는지 서술한다. 심경이 변화된 경험은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쓰며 고민하고 반성하는 다시 살아내기의 과정(Clandinin, 2015)이 시작되는 중요한 순간이다. 다시 살아내기는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고, 깨달음을 얻은 뒤의 삶은 이전보다 더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배 속에 있을 때 아내는 태교 동화와 음악을 수시로 들려주었고, 음식을 가렸다. 태어나서부터 적어도 돌까지 아내는 신뢰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당연한 듯 위생, 상호작용, 애착, 자율성 존중 등 육아, 심리학 서적에서 그래야 한다는 것은 모두 따르며 가장 표준의 육아 방침을 지켜내려 노력했다. 나는 취업을 핑계로 표준 이하의 관여를 했지만 말이다. 아이가 말을 배우고, 인지활동이 활발해지고, 정서를 표현하고, 행동이 자유로워지면서 표준을 벗어나는 변수가 생겼다. 아이는 초콜릿 맛을 알게 되고, 티비를 보는 재미를 알았고, 입맛에 기호가 생겼으며 조금씩 튼튼해지는 사지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취업을 하기 위해 카페를 전세 내다시피 하여 논문을 쓰고 있었고, 1년 뒤 취업이 되며 주말 가족이 되었다. 아이의 발달과 더불어 생기는 결정의 고민은 아내의 몫이었다. 나는 육아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지 못한 데서 오는 죄책감을 지닌 채 취업을 한 뒤에도 일에 묻혀 있었다. 코로나는 이런 나에게 고개를 들고 가족을 돌아보게 만든 계기였다.

코로나에 묶여 있던 아이를 보며 나는 우리의 관계를 되짚어 보았다. 아이의 잉태 소식을 들은 날부터 그때껏 내가 가졌던 다짐과 나와 아이에게 걸었던 기대를 떠올렸다. 좋은 아빠가 될 것이라는 다짐과 어떤 아이로 자랄지 궁금함에서 오는 기대. 뱃속 사진부터 여태까지의 사진, 메모를 시간순으로 들추어보았다. 여러 기억이 있지만 가장 큰 감정이 일었던 두 개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이가 태어나고 두 달쯤 되었을 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와 첫 눈맞춤을 했던 날, 가슴이 쿵쾅거렸던 두근거림과 전율을 여태껏 왜 잊고 있었을까. 처음으로, 진정으로 ‘내 아이구나’라는 생각을 들게 했던 아이의 제스쳐였는데. 두 살 쯤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 꿈에 나타난 아이. 지금처럼 소식을 하는 듯 마르고 키가 큰 소녀가 무릎까지 오는 치마에 무릎까지 오는 하얀색 스타킹을 신고 서 있었다. 긴 머리카락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누군가와 재잘거리고 있었다. 잠에서 깨었을 때 경이로움을 느꼈다. 몇 년이 지나면 어떤 목소리를 낼까, 얼굴은 어떻게 변해갈까, 뛰는 모습은 어떨까, 종종 상상했지만 10년을 뛰어넘은 그 모습은 내 아이라는 생각을 넘어 아이가 20대, 30대가 된 먼 미래까지 기대하게 했다. 감정회상은 내가 잊고 있던 숨겨져 있던 감정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자 나에게 이런 의미를 가진 아이와 가깝게 지내지 못했던 것과 그로인해 침해되거나 더 보장되지 못했을 아이의 권리에 죄책감이 밀려왔다. 4대 권리니 원칙이니 하는 것들을 잘 아는 것처럼 글을 써댔지만 정작 그 권리와 원칙이 내 아이를 향해 있지는 않았다. 아이의 권리는 성인과의 관계에서 침해되고 보장될 수밖에 없다면(김호현, 2019) 나와 함께 있을 때 아이의 권리는 온전했을까. 나는 아이에게 최선의 이익이 되는 방향을 고민하고 선택해왔는가. 나는 어쩌면 나와 아내의 공동체 안에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아이의 자리를 마련해주는 환대의 제스쳐를 여태 취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김현경, 2015). 취업이니 업적이니 수많은 핑계를 댈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지난 시간 동안 나는 아이에게 가족 공동체 안에 자리를 마련해주지 못한 것이었다. 환대받지 못한 자의 권리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나는 그동안 가족을 위한다며 가정에 신경을 쓰지 않은 아빠들의 흔한 클리쉐를 그대로 따르며 아동 최선의 이익을 계속 미뤄왔던 것이다.

권리를 공부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 수치심이 들었다. 아이의 과거를 떠올리고, 꿈에서 본 미래를 떠올리자 더 먼 미래를 상상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미래 어디까지 아이와 함께 할 수 있을지, 그 미래에 내가 함께 할 수나 있을지 궁금했다. 얼마나 먼 미래에 얼마나 큰 행복을 위해 지금 함께 하지 못할까. 이어 질문이 던져졌다. “지금 우리는 이것으로 충분할까.” 이 질문이 떠오른 순간 아이를 향한 전에 없던 후회, 자책으로,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갈 행복이 충만한 삶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2020년 코로나는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며 시작되었다. 이 질문은 “의사결정에서 아동 최선의 이익이 고려되었는가”로 재구성될 수 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일상에서 우리가 아이에게 했던 ‘충분’과 ‘최선’의 적정선을 우리가 잘 찾았는지, 아동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정답을 찾았는지 확실치 않았다. 이 세 가지 이슈에 관해 되짚어보는 일은 아동 최선의 이익을 고민하는 과정과 다름없다.

2. 최선의 이익 고민하기
1) 부모와 자녀 요구 사이의 적정선을 찾는 일
“아이 유치원에 다섯 살 반 여자아이 엄마가 자기 아이를 태권도 학원에 보낸대. 아이가 소심해서 적극성을 기르려고. 애가 너무 너무 가기 싫어해서 갈 때마다 씨름한대. 우리 아이도 앞으로 피아노든 발레든 아니면 한글이나 영어를 배우게 하고 싶은데 아이가 싫어하면 어떡하나 벌써 고민되네.”
<아내와의 대화 2021.10.10>

이 고민은 2022년 지금 현실이 되었다. 올 초부터 피아노를 배우던 아이가 어느 날 그만하고 싶다고 한 것이다. 태블릿으로 하는 영어와 한글 공부도 그랬다. 협약 12조이자 의사 존중의 원칙에 따라 우리 아이는 ‘자신의 감정, 생각, 견해를 다양한 방식으로 자유롭게 표시해야 하며, 성인은 그 의견을 경청하고 아이의 연령과 성숙도에 따라 비중이 부여되어야 하지만’ 얼마나 경청해야 하고, 어느 만큼의 비중을 부여해야 할지 알기 어렵다. 여느 가족 안에서나 일어나는 부모와 아이의 대립 문제는 ‘제발 좀 하라’는 부모와 ‘하기 싫다’는 아이 양방의 입장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아이는 졸리거나 배가 고플 때만 고집을 부리는 것을 빼면 설명에 잘 수긍하고 우리 의견을 따르는 편이었다. 올해 일곱 살이 되면서 주장이 강해지고, 삐지고, 대들기 시작했다. 많이 변한 모습에 당황스럽고 화가 나기도 하지만 우리 부부는 이 변화를 발달의 양상으로 이해하였다. 진화하는 능력 개념에 비추어볼 때 어른의 규칙을 따르던 단계에서 스스로 판단하는 단계로 인지적 자율성이 커졌다는 의미로 말이다. 생각이 여기에 다다르면 아이는 존중과 대화의 주체로 격상될 수밖에 없다. 최선의 이익을 판단하는 일이 상황과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말의 의미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어나는 아이의 인지, 신체 등의 변화에 맞게 아이를 대하는 태도와 아이를 위한 판단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이전의 아이와 지금의 아이는 분명 다를 테니까. 그러나 아이의 상태가 격상되었음을 인정하는 일이 아이의 의견을 모두 수용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최종적으로 최선의 이익을 결정하는 일은 부모에게 달려있으니까. 일단 우리는 아이에게서 그만하고 싶다는 이유를 듣고자 했다. 아동 최선의 이익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판사들이 주장의 타당성과 일관성을 살피듯(Archard & Skivenes, 2009) 이 기준으로 아이의 주장을 살펴보면 태권도든 피아노든 영어/한글 공부든 하기 싫은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하고, 꾸준한 거부냐, 일시적인 감정이냐가 중요한 판단 근거가 될 수 있다. 이 기준에 따르면 태권도 아이처럼 매번 씨름할 정도라면 꾸준한 거부에 해당할 터이고, 하기 싫은 근거가 뒷받침된다면 태권도 학원에 보내지 않는 것이 12조와 3조를 모두 지키는 길이라 생각될 수도 있다. 우리 아이는 한 주 정도 거부하다가 다시 피아노와 한글, 영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쉽게 우리가 의도한 방향으로 아이가 움직여준 것이다. 아이와 대화하면서 피아노와 공부를 하기 싫은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고, 아이는 그 시간에 장난감 놀이를 하고 싶다는 이유를 대었다. 우리는 이것을 일시적인 감정이라고 판단한 뒤 재촉하지 않았고, 아이의 의견을 받아들여 피아노와 공부를 하지 말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일주일을 아무 말 않고 기다렸고, 아이는 먼저 자연스럽게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그 뒤 지금까지 아이는 학습 시간을 기다리는 한편 힘겨워하거나 지루해할 때도 있지만 하루 10분의 피아노 연습과 일정 분량의 한글, 영어 학습지를 곧잘 하고 있다. 사실 일곱 살 아이를 강제로 의자에 앉혀서 이루어지는 ‘학습’의 인권 침해성 문제는 발달적 적합성 측면에서 사회적 이슈가 될 수밖에 없는 듯하다. 아동 최선의 이익 관점에서 부모에게 학습은 발달권 보장을 위한 최선이고, 이 최선이 아이의 선택권을 제한하는 결과를 가지고 오는데 이것은 발달권과 선택권의 충돌 안에서 전자와 후자 중 어느 권리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입장을 갈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아이를 강제하지 않았고, 스스로 선택하기를 기다렸다는 점에서 선택권과 발달권을 모두 잡을 수 있었지만 만약 아이가 끝내 거부했다면 아쉽지만 아이의 선택권을 존중했을 것이다. 이렇듯 권리의 충돌 문제는 교사, 유아, 학부모 사이에서 의견 충돌을 만드는 원인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김호현, 2020; Thomas & O’Kane, 1998). 나 역시 내 아이의 학습 이슈에 관한 생각을 지금 풀어쓰기에는 긴 논의가 필요하지만 아이다움을 해치지 않는 방식의 학습을 고민하고 있다. 이 고민은 아마 학습 범위가 더 넓어지는 초등학교 이후 더 깊어질 듯하다.

한편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아이가 고집을 강하게 부리는 영역이 있었다. 먹을 것과 신발이었다. 맛에 기호가 생긴 뒤부터 아이는 낯선 음식을 무조건 거부했다. 과자든 반찬이든 평소 먹던 것이 아니면 아이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 고개를 흔들었다. 또 계절을 고려하지 않은 채 신발을 신으려 했다. 한겨울에도 흰색 찍찍이 슬리퍼만 신으려고 했고 입씨름이 오갔다. 아이가 강하게 거부할 때는 우리도 입을 닫는다.

  • 아내: “작년에는 흰색운동화를 고집했거든 추운데도 그걸 신겠다고. 처음에는 실랑이를 많이 했었어. 신어라, 안 신는다. 나중에는 그냥 신고가라 했지. 자연적 결과를 느끼라고”
  • 나 : “어떻게 됐어?”
  • 아내: “며칠 신다가 바깥놀이를 길게 한 날 추웠나봐. 다음 날부터 겨울 신발 신었어.”
  • 나 : “사실 신발 때문에 실랑이 한 거는 우리로서는 감기 걸릴까 예측이 되니까, 최선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이해 되는데, 그럼 안 먹으려고 하는 음식이나 채소를 먹이려는 거는 아이를 태권도 학원에 보내는 거하고 비슷하지 않아? 싫다는데 시키는 거.
  • 아내: “채소는 건강 걱정 때문에”
  • 나 : “태권도도 성격 걱정 때문이라면. 엄마 입장에서 자기 아이가 적극적인 성격이 되면 지금보다 더 좋은 삶을 살게 될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 억지로라도 보냈다면 최선의 이익을 고려한 걸까. 똑같이 아이 건강을 위해서 채소를 매번 억지로 먹이는 것은 최선의 이익을 고려한 걸까”
  • 아내: “나는 몇 번 권유해보고 안 먹는다고 하면 놔두긴 하는데. 차이가 있을 것 같아. 권유냐 강요냐. 그리고 태권도 아이나 우리 아이나 아이다운 모습이 있는데 그걸 덮어두고 내가 원하는 걸.. 아이마다 다 다른데 그걸 인정하는 게 중요할 것 같은데.”
  • <아내와의 대화 2021.10.10>

나는 이 사례를 자유와 권리, 영역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았다. 우선 자유와 권리의 관점에서 볼 때 싫은 음식이나 채소를 먹는 것과 태권도 학원에 다니는 일이 최상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냐 하면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3중 개념의 절차규칙에 따라 판단의 결과를 고려해볼 때 억지로라도 음식을 먹이고, 태권도 학원에 보내는 일은 미래의 건강을 위한다는 명분이 되니까. 또 재판에서는 최선의 이익을 판단하기 위해 아이가 자기 행동의 결과를 알고 있는지 판사가 듣고 평가하는데(Archard & Skivenes, 2009) 이것은 아이의 예측과 추론의 인지 능력을 살펴보기 위한 것으로 결과를 적절하게 예측해내지 못한다면 아이 의견보다는 부모의 의견 즉, 싫은 음식을 먹이고, 태권도 학원에 보내는 것이 최선의 이익이라 판단될 수도 있다.

그러나 부모와 자녀는 동등하게 존엄하고 평등하고, 자유롭기 때문에 위계나 권력관계를 설정하여 ‘내 말을 들어야 한다’는 태도를 가지는 순간 그것은 최선의 이익이 아니게 된다. 나는 이것을 이렇게 고민해보았다. 아이에게는 어떤 이유로도 침해되어서는 안 되는 최소의 개인영역이 존재해야 하므로 아이의 사생활 영역과 부모라는 공공 권위 영역은 구분되어야 한다(Berlin, 2014). 협약은 16조 ‘어떠한 아동도 사생활에 대하여 자의적이거나 위법적인 간섭을 받지 아니한다’를 통해 사생활권의 보장을 명하고 있다. 무엇을 먹을 것인지, 학원에 다닐 것인지 여부가 부모의 간섭이 배제되는 사생활 영역이라면 부모는 먹이고, 다니게 하는 일에서 손을 떼야 한다. 그러나 영양분 섭취는 미래의 건강을, 학원이나 영어/한글은 신체, 인지 발달에 도움이 된다. 특히 영어 등 외국어 학습은 흡수정신이 뛰어난 민감한 시기에 경험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상급 학교에 진학한 뒤 어차피 배워야 할 외국어라면 흡수력이 빠른 어린 시기에 부담 없이 듣고 말해보는 경험이 왜 나쁜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민감한 시기라 하더라도 강요의 방식으로 결정해도 되는가, 이것으로 아이가 잃는 것은 무엇일까.

강요는 아이의 미래와 권리를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권력을 사용하는 아이러니를 만들어낸다. 아내와의 대화에서 나타나듯 그 과정이 강요였냐는 점, 아이다움을 고려했느냐는 점은 그 행위가 최선의 이익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지점이다. 강요가 동반되는 권리 침해는 특권을 유지하는 토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정정훈, 2014). 권리에 내포된 존중, 평등의 원칙은 권력 관계 사이에서 깨어지게 마련인데 그렇게 권력 우위 이에 의해 결정된 최선의 이익은 아이의 견해를 반영하지 않은 일방의 강요일 수 있다. 두 번째로 아이다움의 고려이다. 아동권리협약에는 세계인권선언으로는 걸러낼 수 없는 아동을 위한 권리를 피아제를 포함한 발달심리학 연구결과를 참고하여 도출하였다. 성인과 아이의 다름을 발달 특성에서 찾아내었고, 그로 인해 협약은 온통 아이다움의 보존에 관한 이야기이며, 동시에 이를 통해 건강한 성인으로의 성장을 이끄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협약 전반에 명시된 양육⋅교육받을 권리, 학대⋅착취당하지 않을 권리, 놀이⋅휴식⋅문화를 즐길 권리 등은 아이가 아이다움을 지켜내어 건강한 성인으로 자랄 수 있는 보호막이다. 이 권리들은 4대 원칙에 해당하는 어른과의 평등, 존중의 관계, 자유로운 의사 선택의 분위기 안에서 보장되는 셈인데 그 반대 극단에 있는 권력과 위계가 내포된 강요는 아이다움의 유지에 해가 될 수밖에 없다. 아이다움을 고려하지 않고 선택을 강요하는 일, 예컨대 태권도 아이의 아이다움을 인정하지 않는 어머니의 결정에 최선의 이익이 들어있을까. 만약 우리 아이가 채소를 싫어하는 것을 아이다움의 한 형태라고 인정한다면 채소를 어떻게든 먹이는 일은 아이다움의 유지에 반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모든 문을 잠그고 권력자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단 하나의 문만 열어둔 채 들어갈지 말지 결정하라는 처사는 자신이 자기가 될 수 있고 자신의 다움을 보존할 기회를 가로막는다(Berlin, 2014). 모든 문을 열어두고 선택게 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의 향유인 셈이다. 우리는 아이에게 아이가 싫어하는 하나의 채소를 주는 대신 채소를 다양하게 요리하여 그중 하나를 선택게 하는 방법을 사용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태권도가 아닌 자신감을 키워주는 다른 여러 학원을 찾아 그중 하나를 선택하게 했다면 어땠을까.

2) 그것이 최선의 이익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대여섯 살 아이들이 아파트 뒤 1층 높이의 낮은 창고 위를 그 옆 돌무덤을 밟고 올라선다. 아이들 키의 세 배 되는 높이다. 창고 위는 펜스가 없었고, 넓지는 않았다. 내가 위로 팔을 뻗으면 아이 허리에 닿을 정도의 높이였다. 네 명의 아이가 올라섰다. 그중 한 명은 내 아이였다. 두 명은 앉아 있었고, 내 아이와 다른 한 명은 서서 한두 발짝 움직였다. 아이들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와 높다” “아빠, 내가 아빠보다 더 커졌어” “저 멀리까지 보여” 등의 말을 했다. 조금 뒤 한 엄마가 와서 그 장면을 보더니 어느 아이에게 화를 내며 “내려와. 떨어지면 어떡하려고 그래.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 어서 내려와. (다른 아이들을 보며) 너희들도 내려와”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실망한 표정으로 서로 눈치를 살피다 한 둘씩 내려왔다. 그 엄마는 나를 한 번 쓱 쳐다보고는 다른 곳으로 갔다. 불안해진 나도 내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내려오고 싶어?” “아니 더 있을래” “위험하지 않겠어?” “괜찮아. 그냥 서 있을 거야.”
조금 뒤 같이 있던 한 아이가 내려오자 내 아이도 뒤따라 내려왔다.
<메모 2020.08.11>

주택에 사는 아이가 심심해할 때면 아이와 함께 차를 타고 근처 아파트로 나갔다. 놀이터에 또래 아이들이 있으면 어울려 놀았다. 이 아파트는 집과 가장 가까웠고, 몇 번 드나들다 친해진 아이들이 있었다. 위 사례에서 나도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낮은 창고였는데 펜스도 없었고, 좁았고, 꽤 높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그 위에서 가만히 서 있었고, 큰 움직임만 없으면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다칠 걱정보다는 지금 아이들의 호기심과 놀이의 즐거움이 우선이라 생각했다. 그들을 막지 않는 것이 최상의 이익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 엄마는 달랐다. 그 엄마가 아이를 내려오게 한 것은 떨어져 다칠 것이 걱정되어서였다. 자기 아이에게 일어날지 모를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 앞으로도 이런 곳에는 못 올라가게 할 것이 자명하다. 이 어머니에게는 닥쳐올 위험을 예방하는 것이 아이에게 최선의 이익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장면이 나에게는 놀권리의 보장으로, 다른 엄마에게는 보호받을 권리로 해석된 셈이다. 나의 판단은 최선의 이익이었을까?

  • 나 : “최선의 이익이랍시고 우리가 대신 결정을 하는데 부모들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그런 결정을 하잖아. 근데 그게 최선의 이익이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겠어?”
  • 아내: “일단 부모교육에서 하는 말인데 아동 의견을 존중하지 않아야 할 때가 있다고. 아이나 남의 생명이 위협될 때. 그런데 오은영 박사님 말 중에 아이들은 체험해볼 수 있어야 한다. 높은 곳을 올라가려는데 무조건 안 된다고 하지 말고 계속 잡아주지도 마라. 대신 바로 옆에서 보고 있어라.”
  • 나 : “위험이 닥쳐올 때는 물어보니 뭐니 할 것 없이 곧바로 아이를 멈추게 할 수 있는 거지. 일단 그런 상황에서 최선의 이익은 아이를 멈추는 것이고. 내 판단이 최선의 이익인지 아닌지 판단 근거 중 하나는 아이가 자신이나 타인에게 위협이 되느냐. 그때 그것을 못하도록 멈추게 했다면 그 행위는 최선의 이익을 고려한 행위인거지.”
  • <아내와의 대화 2021.10.11>

창고 위의 아이들에게 내려오라고 한 엄마는 그것을 위험으로 보았고, 그 엄마에게는 그 결정이 아이에게 최선의 이익이었다. 아내가 언급한 ‘아이나 남의 생명이 위협되는 상황에서 의견 존중을 하지 않아야’ 했던 상황인 셈이다. 이것은 부모가 자녀를 위해에서 보호하기 위하여 자녀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원칙과 다름없다. 협약과 일반논평7에 언급된 ‘유아는 지도와 보호를 요한다’는 문구를 따르자면 부모에게 간섭의 정당성이 부여될 수 있다. 누군가의 복지를 위해서라면 그의 의사에 반하여 권력이 개입할 수 있다는 개념인 권위적 간섭주의(paternalism)는 힘의 남용 문제가 따르지만(Chamberlin, 2012) 필요할 때가 있는 법이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이후 법철학자인 파인버그 등에 의해 다져진 바에 따르면 권위적 간섭주의는 대표적으로 강경(hard) 간섭주의와 온건(soft) 간섭주의로 나뉜다. 강경 간섭주의는 행위자가 정당한 판단과 자발적 의사에 따라 내린 결정이라도 그에게 위해가 가해지리라 예측된다면 국가의 개입이 정당하다는 주의이고, 온건 간섭주의는 자신에게 위해가 가해지는 행위를 하는 과정에서 지식 부족, 음주⋅약물 등에 의한 통제력 부족 등 충분한 능력과 자율성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만 국가가 개입할 수 있다는 주의이다(Feinberg, 1986). 법철학 논의에서 자유는 인지적 자율성, 즉 여러 정보를 종합하여 결과를 예측하는데 필요한 합리적 판단 능력(competency)을 갖춘 사람, 예컨대 18세 이상의 정상 성인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미성년자 혹은 성인이라도 술과 약에 취하여 그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개입과 제재의 대상이 된다. 심지어 법철학에서 미성년자의 지위는 술과 약에 취한 사람과 동일하다. 자유를 제한당해 마땅한 사람의 범주에 함께 들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합리적 판단 능력 보유 여부와는 상관없이, 밀의 예시처럼, 누구든 곧 무너질 다리를 건너려는 이를 경찰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못 건너도록 멈춰 세울 수 있다는 쪽이 강경 권위적 간섭주의이다. 위험이 예견될 때 자유는 무조건 제한되는 것이다. 합리적 판단 능력이 부족한 이에게만 자유가 제한된다는 입장이 온건 권위적 간섭주의이다. 다리가 무너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만 그를 멈추어 세울 수 있고, 다리가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위험하더라도 건널 수 있는 자유를 주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온건주의는 강경주의의 자유권 침해 논의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셈이다. 이 논의는 국민의 복지를 책임지는 국가가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어디까지 보장하고 침해할 수 있는지를 두고 일어나는 논쟁이지만 부모와 자녀, 교사와 학생 관계에도 적용된다.

권위적 간섭주의를 토대로 볼 때 위 사례의 어머니는 강경 노선이다. 자녀가 결과를 예측하는지, 어떤 생각으로 창고 위에 올라섰는지 확인하는 과정 없이 위험이 예측된다는 이유만으로 아이의 자유를 제한했다. 부모로서 아이의 보호받을 권리를 존중했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보호받을 권리를 앞세울 때 다른 모든 권리들은 배제될 수밖에 없다. 보호권을 중심에 둔 강경 권위적 간섭주의가 발동되는 즉시 청문, 의사표현을 포함한 참여권, 놀권리를 포함한 발달권은 제한되는 셈이다. 그러나 강경 권위적 간섭주의는 의사표현, 놀이, 문화를 포함한 자기 삶을 이루는 영역, 종교나 신념을 스스로 결정할 자율성을 침해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Scoccia, 2008). 능력이나 나이와 관계없이 누구든 울타리 없는 높은 창고 위에서 떨어질 듯 아슬아슬한 행동을 한다면 멈춰 세워질 수 있겠지만 그때는 그만큼 시급한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이들은 내가 손을 뻗으면 허리에 닿을 정도의 높이에 있었고, 나는 손을 뻗을 준비를 한 채 바로 아래에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아이의 의사를 물어볼 여유 정도는 있었다. 내려오고 싶으냐는 내 물음에 계속 있고 싶고, 위험을 인지하여 움직이지 않겠다고 했다. 아이의 의사를 확인한 나는 아이가 다리를 건너는 모습을 지켜본 셈이다.

그렇다면 그 엄마가 예측한 것은 위험이 맞을까? 이전부터 부모들의 강경 권위적 간섭주의를 곳곳에서 목격하던 차였다. 집에서는 소파 위에서 뛰지 마라, 계단을 오르내릴 때는 뛰어서 오르지마라, 야외에서는 올라서지마라. 그리고 한 마디를 더한다. “위험하다” 혹은 “다친다.” 항상 궁금했다. 아이들의 행위가 강경주의로 멈추어야 할 정도의 위험을 불러올 것이 예측되었을까. 나는 조효제(2020)의 danger와 risk 구분에서 의미 있는 팁을 발견했다. 지나친 보호가 도전과 체험의 기회를 제거한다는 점에서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인 danger는 줄이되 확률적 위험인 risk는 감당할 필요가 있다는 논의이다. Kaplan과 Garrick(1981)은 risk=hazard/safeguards라는 공식을 통해 위험확률을 인지한 상태(safeguard)를 증가시킴으로써 위험 그 자체(harzard)를 낮추고 결과적으로 위험확률(risk)을 줄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창고 위 사례에서 safeguard는 아이 스스로 위험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 내가 팔을 벌릴 준비를 한 채 바로 밑에서 지켜보고 있는 상태이다. 혹시 아이를 내려오게 한 부모는 risk를 danger로 생각한 것은 아닌가, 리스크를 고려하여 높은 곳에 올라가게 놔두는 것은 최상의 이익인가.

  • 아내: “맞지. 보호하면서도 참여기회를 주니까.”
  • 나 : “그렇네. 보호권과 참여권의 동시 달성. 창고 위에 올라간 것 자체를 danger로 보고 아이를 내려오게 하는 것이 아이의 보호권을 고려한 것이라면 risk로 보고 놔둔 부모는 아이가 올라가 놀고 싶은 참여욕구까지 고려한 거네.
  • <아내와의 대화 2021.10.11>

놀이에서의 위험사례는 높은 곳을 올라가는 것 외에 유사한 사례, 예컨데 빠른 속도로 달리기, 위험한 물건 가지고 놀기, 위험 물질 근처에서 놀기, 거친 신체놀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질 수 있는 장소에서 놀기(Sandseter, 2007) 상황에서도 risk의 관점에서 잠재적 위험을 감수하고 참여기회를 제공하는 부모와 danger의 관점에서 보호권은 보장되지만 참여권을 배제하는 부모가 있다. 두 부모 모두 각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판단이 최상의 이익이라 주장할 때 보호와 참여를 모두 잡는 부모에게 한 표 던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3) 아내의 최선과 남편의 최선이 다를 때
  • 아내: “자기 전에는 잘 준비를 해야지. 조도를 좀 낮게 하고 책 읽다가 자게.”
  • 나 : “막 뛰어 놀다가도 잘 자는데 뭐.”
  • <아내 일기 중 일부. 2019. 11.03>

아내는 아이를 씻기기 전에 방에 스탠드 조명을 켜고, 공기청정기를 작동시키고, 가습기를 켜둔다. 아이는 아빠가 없는 날이면 혼자 책을 보다가, 누워서 엄마가 읽어주는 그림책 이야기를 들으며 잠이 든다. 아빠가 있는 주말이나 방학이 되면 방의 불은 더 밝아지고 아빠 손에 들려 하늘을 날고, 침대가 배가 되고, 베개가 우주선이 된다. 아이는 꺆꺆 거리며 신나 했다. 아이의 밤은 정적이 흐르는 아내가 만든 밤과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아빠가 만든 밤으로 나뉜다. 우리가 생각하는 최선의 이익이 달랐던 셈이다. 그러다 코로나 8개월은 아빠의 시간이었다. 거의 매일 밤 아이는 바다, 우주, 동물원에 오갔다.

이 충돌은 우리 부부에게는 답을 찾기 어려운 사례였다. 아내는 육아책과 전문가 영상에서 배운 대로 수면에 최적의 공간을 만들려 하였고, 나는 아버지와의 거친 신체 놀이가 미치는 영향이 최적의 수면 분위기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왜 그 시간이었냐 하면 일 때문일 수밖에 없었다. 일을 하고 돌아와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고 놀이터에서 놀고 온 뒤 기대에 찬 목소리와 눈으로 “오늘은 무슨 놀이 할까”라고 묻는 아이를 수면상태를 이유로 거절할 수 없기도 하였다. 자기 전에는 뇌를 편하게 하라는 의학적 소견을 따를 것인가, 거친 신체 놀이의 효과를 증명하는 심리학 결과를 따를 것인가. 의학과 심리학 사이에서 우리 부부는 약간의 감정싸움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둘 다 선택할 수 있었다. 초저녁에 놀이한 뒤 밤에 푹 자는 것. 어찌 되었든 그때는 서로 다른 최선의 이익을 두고 서로 주장을 했다. 아내가 양보하는 편이었는데 다시 줄어들지 모를 아빠와 함께하는 시간의 소중함과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라는 생각에 자기 믿음을 실행하기를 포기한 결과였다. 이것은 아내가 아동 최선의 이익을 고려하는 자신의 방식인 셈이었다. 어찌 되었든 각자의 주장만 있고 정답이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암묵적으로 합의를 한 셈이다. 나와 아이의 욕구, 관계, 심리학을 따르는 것으로.

그렇지만 아내는 한 번씩 자기 방식을 따라달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사소한 문제처럼 보였으나 각자의 방식을 서로 인정하지 않는 데서 오는 서운함, 기분 나쁨 같은 것들이 우리의 감정을 틀어지게 했다. 일상에서 아이를 사이에 두고 종종 둘의 충돌이 일어났다. 음식을 떠먹여 주지 말라는 아내와 스스로 먹을 때까지 먹여주자는 남편, 티브이는 짧게를 주장하는 아내와 티브이 속 이야기를 대화로 나누면서 길게 봐도 된다는 남편, 아파트에서 수시로 살살 걷자는 남편과 지나치다는 아내. 아이에게 무엇이 최선인지를 두고 일어나는 일상의 사소한 의견 차이이지만 이런 일상은 골을 깊게 팠다. 간혹 나의 짜증스러운 목소리와 적절하지 않은 단어로 만들어진 말이 날카롭게 아이의 귀에 꽂혔을 것이다. 그때마다 아이는 한 구석에서 힐끔 우리를 쳐다보면서도 애써 모른 척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각자의 최선이 다른 이 사례들은 아동 최선의 이익 3중 개념 차원, 아이의 자유를 제한하는 권위적 간섭주의 차원, 의학이냐 심리학이냐를 두고 누구의 말이 맞는지를 확인하는 팩트의 차원으로도 논의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부부의 생각이 다를 때 누구의 생각이 아동 최선의 이익이냐를 따지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갈등을 슬기롭게 해소하여 가정을 평화로운 분위기로 유지하는 것이다. 아무리 최선의 이익에 관한 것이라 해도 각자의 주장을 굽히지 않다 감정 다툼으로 발전된다면 그때부터 아동 최선의 이익은 사라지고 한 구석에서 불안에 떠는 아이만 덩그러니 남게 된다. 그 점에서 협약 18조 1항 “부모는 아동의 양육과 발달에 일차적 책임을 진다” 27조 2항 “부모는 능력 범위 안에서 아동 발달에 필요한 생활여건을 확보할 일차적 책임을 진다”의 발달 및 그에 필요한 생활여건은 협약 전문에 언급된 “아동은 완전하고 조화로운 인격 발달을 위하여 가족적 환경과 행복 사랑 및 이해의 분위기” 안에서 마련된다. 아내와 간혹 다툴 때 아이의 시무룩한 표정과 눈치 보는 행동을 보면 아동권리협약이 가족의 중요성을 그토록 강조한 이유를 알 수 있다. 협약 전반에 언급된 가족의 소중함, 예컨대 가족의 책임과 의무(5조), 가족관계의 보존(8조), 가족의 재결합(9조), 가족에 대한 위법적 간섭 금지(16조), 가족구성원 추적 노력(22조), 가족계획 돕기(24조), 가족과의 접촉 보장(37조)은 협약이 가족의 역할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보여준다. 일반논평 7호 ‘유아기에서의 아동권리의 이행’은 기존 심리학 연구를 바탕으로 부모와 가족 구성원의 보살핌, 교육, 신념과 기대가 현재의 4대 권리 보장을 넘어 미래의 건강한 발달과 이어져 있음을 언급한다. 우리 경우는 다투는 것도 간혹이고, 아이는 시무룩 정도인데 부부간 죽일 듯 싸우는 심각한 다툼에 비하면 문제가 될 것이 없지 않으냐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권리 공부를 하면서 혼란스러웠던 것은 이론과 현실의 극심한 차이였다. 장애/비장애아동의 통합교육에서, 용의자를 잡는 과정에서 상처를 입힌 경찰과의 면담에서, 살인마를 처형할 것인지를 묻는 사형제도의 존폐 논의에서 나는 권리를 주장하는 쪽의 입장에 쉽게 공감되지 않았었다. 통합교육에서 장애학생의 모종의 권리를 위해 침해될 수도 있을 비장애학생의 학습권은 어떻게 하나. 체포과정에서 다칠 위험에 처한 경찰보다 용의자의 안전이 더 중요할까. 극악무도한 살인마도 피해자 가족 앞에서 생을 이어갈 권리가 있을까. 현실이 반영되지 않은 결정이라 생각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긴 논의가 필요하지만, 그러한 결정의 한 이유로 권리는 완전하게 지켜지는 방향으로 가야하기 때문이다. 권리를 절대적으로 지켜야하는 최고선으로 보게 되면 내 권리가 무조건적으로 중요해져 양보와 타협의 여지가 사라질 수도 있지만(조효제, 2007) 누군가에게 권리는 그래야 한다. 권력관계의 아래에 있어 언제든 배제되고 무시될 위치에 있는 사람들, 예컨대 장애인, 다문화인, 성소수자, 아동의 권리는 절대적으로 지켜지지 않는 이상 정치적으로는 예산이 삭감되고, 현실에서는 버스를 타지 못하고, 따돌림 당하고, 맞기도 한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을 때 권리침해의 범위는 더 넓어진다. 사형제도 폐지에는 아직 동의하지 못하지만 용의자도 경찰과의 권력관계 아래에 있다고 보면 위 논의가 적용될 수 있다. 위 논의는 권력관계가 만들어지는 모든 영역에 적용된다. 교사-학생, 원장-교사, 장교-병사, 대통령-국민 관계에서 교사, 원장, 장교, 대통령의 권리는 언급되지 않고 그 반대쪽 사람의 권리만 언급되는 이유는 권력관계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어도 이들의 권리는 무조건, 완전하게 지켜지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그 근처에라도 닿을 수 있다.

가족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가족 안에서도 권력관계가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우리도 다르지 않을 테지만 참다참다 간혹 다투고, 아이가 시무룩해지는 정도의 우리 가족 분위기는 아이의 눈치를 보고, 아이에게 해가 되는 것은 피하려 하는 노력이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이 정도라도 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우리 스스로 아이의 우위에 서지 않으려는 암묵적 다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에서 만민의 평등과 공정은 선언에 불과하고 직위, 돈, 학벌이 현실의 우위를 결정하고 있음(Sandel, 2020)을 인정하면 부모와 자녀 사이의 평등도 허구에 불과하다. 부모의 지위, 큰 신체, 경제권이 자연스레 우리를 우위에 두니까. 부모는 ‘아이의 의견에 정당한 비중을 부여’할 권한을 가지고 아이의 우위에서 대신 판단하는 위치에 있음을 협약도 인정하고 있으니까. 나는 나와 아이 사이는 평등하지도, 평등할 수도 없음을 안다. 그리고 부모-자녀의 평등이 의미하는 바는 우위에서 강요하거나 고민 없이 판단하지 말 것을, 우위에 있는 자는 언제든 위험인물이 될 수 있음을 새기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부모에게 주어진 자녀에 대한 권한을 정당하게 활용하는 것이 곧 부모-자녀 평등의 본질이 아닐까. 권한을 정당하게 활용한다는 것은 아이의 권리는 절대적이고, 다른 어떤 이유로도 결코 양보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무장하고, 최대치의 노력을 기울이려는 시도가 아닐까. 그 근처에라도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런 생각으로 우리 부부가 간혹 다툴 때 아이가 시무룩해지는 일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순간만큼은, 혹은 그 이후까지 여파가 남아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그 일은 권리의 최대치에 닿지 않게 만들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가정폭력의 범위를 넓게 잡으려 한다. 우리의 다툼으로 아이가 시무룩해지는 일은 협약 17조에 언급된 ‘모든 형태의 신체적 또는 정신적 폭력’의 결과로 받아들이고, 일반논평 13호 ‘어떠한 아동폭력도 정당화될 수 없다. 모든 아동폭력은 예방이 가능하다’는 언명을 명령으로 받아들인다. 이 다짐은 앞으로도 언제든 수백 가지의 다툴 일이 있을 우리 부부에게 아동 최상의 이익은 팩트든 논리든 억지든 아이를 위한답시고 각자의 주장을 펼치는 일이 아니라 아이가 사이에 있음을 알고, 아기가 가진 최대치의 권리에 닿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일이 될 것이다.


Ⅴ. 되짚어본 끝에 알게 된 것들

아동 최선의 이익을 중심으로 아이와 있었던 일을 아내와 함께 떠올리는 경험은 의미 있었다. 아이의 옛 사진과 영상을 보며 웃었고, 우리의 미숙함에 숙연해졌고, 나의 과오를 반성했다. 우리 부부는 나름대로 발현적 귀 기울이기(Davies, 2017)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자부했고, 아이에게 최선의 이익인 것을 찾으려 노력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나는 얼마간의 지식으로 가족들이 아이를 두고 겪는 흔한 사례를 나름대로 해석해보았다. 아동 최선의 이익은 명확하게 해석하기 어려운 법 용어이지만 현실에서 정교화될 필요성이 있다(Zermatten, 2010, p. 493)는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며 일상의 사례를 다루어 보았다. 해석이 미숙하고, 고민이 잘 전달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이 해석의 과정에서 아동 최선의 이익 개념을 조금은 더 깊숙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더 다양한 지식이 쌓이고 공부가 더 깊어지고 지속된다면 또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어찌 되었든 지난날을 되돌아보니 아동 최선의 이익을 찾을 노력을 하지 않거나 대충 결정을 한 경우도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의 마음속에 들어가 그 아이가 되어 아이가 원하는 것, 말하고 싶어 하는 것,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을 매 순간 찾고,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계속 아이 마음속에 닿으려 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동 최선의 이익은 말 그대로 부모에게 베스트만을 찾아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베스트를 찾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하라는 의미와도 같다.

그만큼 우리 부모의 시간과 노력도 빼앗길 터이다. 아이의 의사를 듣고, 선택할 기회를 보장하고, 최선의 이익을 찾아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군가의 권리를 보장하는 일은 원래 어렵다. 권력관계 우위의 이들이 언제든 아래의 이들을 배제하려는 이유도 독재가 편하고, 빠르고,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가 국민의, 교사가 학생의, 부모가 자녀의 권리를 보장하는 일은 자율이 아니라 의무로 설정한 것이다. 해야 한다는 의무가 부담을 발생시키고, 인간은 서로에게 부담을 질 수밖에 없다. 의무의 시작은 부담감인 셈이다. 어쩌면 내가 아이에게 잘 해왔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이 글도 아이를 가진 연구자로서의 부담이 그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모든 부모가 그렇듯 나도 의무로 자녀에게 시간을 쓰지는 않는다. 의무가 법에 따라 부여된 인위적 성격을 가진다면 아이에게서 오는 부담은 자연스러운 안쓰러움, 절로 느껴지는 경외, 웃음, 슬픔, 두려움이다. 봄에 꽃이 피고 겨울에 꽃이 지는 자연의 법칙처럼 인간에게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법칙이다. 나는 부담을 인권감수성의 다른 말로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다른 누군가의 복지를 위한 일에도 시간과 노력이 든다.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는 일, 버스에 타는 장애인을 기다리는 일, 해외로 나가 난민을 돕는 일은 크든 작든 내 시간과 에너지가 드는 일이다. 이것은 자녀에게 쓰는 시간과는 달리 의무만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할 자유를 스스로 제한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타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일은 어찌되었든 불편함과 자유를 스스로 감수하는 일이다. 인간은 역사적으로 더 도덕적인 방향으로 진화해왔음(Shermer, 2018)은 자명해 보인다. 공감능력이 생겨났고, 더불어 도덕지능이 점차 향상되었다. 진화의 흐름을 타고 인간들은 숨어있는 인권 개념을 계속 찾아내고 있다. 이런 역사의 흐름을 따르자면 ‘아동의 인간적 존엄성과 신체적⋅심리적 보전을 존중하고 증진하는 방향으로 패러다임이 바뀌기를 요구한’ 일반논평 13호의 바람은 눈에 띄지 않게 계속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권리는 모종의 사안을 마음대로 결정케 하지 않고 의사결정 과정을 거치게 만드는 힘이 있는 듯하다. 화를 내려다가도, 대충 둘러 대려다가도, 아빠 부르는 소리를 못 들은 척 하려다가도 권리가 떠오르면 그런 짓들을 못하게 된다. 어떤 때는 아내와 오랜 고민을 한 뒤 결정을 할 때도 있다. 역시 최선의 이익을 고민하는 과정은 지난하고, 짜증나고, 머리 아픈 과정이다. 아이와, 아내와 다툼을 만들기도 한다. 최선의 이익은 이것도 이겨내야 할 과업이라 말하고 있다. 사실 아이들은 스스로 논다. 스스로 놀거리를 찾고, 무엇이든 놀잇감으로 만들고, 어디에서든 친구를 만들어 스스로 욕구를 채운다. 배가 고프면 밥을 찾듯 어쩌면 인간은 스스로 권리를 찾는 본능을 가진 것은 아닐까. 그리고 역시 성장하는 존재이다. 지난 논문(김호현, 2017)에서 다섯 살 아이와 여섯 살 아이의 능력 차이가 얼마나 있을 것인지 의문을 제기했었다. 아이가 다섯 살이던 겨울에 아무리 설명해도 얇은 흰색 운동화만 신으려 고집을 부렸다면 이제는 좋아하는 구두를 신으려 할 때 ‘숲놀이 간다던데’라고만 말해도 “아 맞다”하면서 운동화로 갈아 신는 정도가 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순간 마음이 가는대로 선택을 하려는 것은 같지만 비계가 주어질 때 앞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아이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변화가 생긴 셈이다. 아이의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다. 학교를 가고, 새로운 친구관계가 만들어지고, 학업 경쟁이 일어나고, 수험생이 될 것이다. 아이가 발달하면서 아이에게 최선의 것도 달라질 것이고, 점차 판단의 정당성의 비중이 우리에게서 아이로 넘어갈 것이다. 이 성장의 시간 동안 아이는 어떤 경험을 하면 좋을까.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때 아이는 창고 위에서 무엇을 경험했을지 떠올려본다. 대단한 뭔가를 보았거나, 삶을 바꿀 정도의 뭔가를 느끼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높은 곳에 올라갔다왔다 정도의 자랑거리, 혹은 지금은 기억에도 남아있지 않을 단기기억성 경험이었을지도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 아이는 자유를 체험하였다. 다른 아이에게는 꺾였지만 자신의 의사로 선택한 자유 경험은 나와 아내의 태도가 변하지 않는 한 짧게 짧게 앞으로도 쌓여나갈 것이다. 그리고 남은 긴 시간, 그렇게 점차 커져갈 자유의지는 아이의 삶에 뭐라도 가져올 터이다. 아이가 어릴수록 자유를 체험할 기회는 오직 부모에게 달려있다. 따라서 부모는 단순히 자녀의 권리를 보장하고 존중해야다는 표면적인 규범을 넘어 아이의 성장 과정에서 매일 꾸준히 일어나는 사소한 결정들을 가벼이 여기지 말고 자유의 경험을 쌓아 갈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부담을 가져야 할지도 모른다. 부모로서 오늘 자신이 했던 몇 가지의 결정으로 부모의 의무를 다 한 듯 안심해서는 안 된다.

아동 최선의 이익은 아이가 그곳에, 눈앞에, 공간을 점유하고 있으니 지나치지 말라고 부모에게 던지는 메시지와 같았다. 이것은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환대(김현경, 2015)이자 아이로 하여금 존엄한 자기표상을 만드는 과정이다(Huther, 2019). 그래서 아동 최선의 이익은 부모가 아동의 능력에 비례하여 자녀 대신 판단을 해줄 수 있지만 권력관계의 우위에 있다는 이유로 본인에게 유리하게 판단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도 될 수 있다. 아동 최선의 이익의 의의는 아동에게 나타날 결과를 고려하여 의사결정 과정을 숙고하고, 성인의 잘못된 힘을 억제하며, 4대 권리와 원칙의 보장과 실행을 실질적으로 가능케하려는 노력을 기하라는 데 있다(Zermatten, 2010). 그 한편으로 아동 최선의 이익을 법적용어로 보지 않고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지난한 숙고의 의사결정 과정을 반드시 거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아빠가 누군가를 만나러 아이와 함께 약속 장소에 가는 도중 길거리에 핀 꽃을 보려 쪼그려 앉은 아이를 재촉 않고 기다리는 일. 약속은 아빠에게나 중요하지 지금 아이에게는 꽃을 바라보는 일이 최선의 이익일 터이다. 이때 아빠는 숙고의 과정 없이 만나기로 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가 꽃을 보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말할 때 상대가 기분 나빠하지 않고 흔쾌히 이해할 날이 진화의 과정에서 언젠가는 올 것이라 믿는다.

이 글에서는 지나간 일을 끄집어내어 그때의 의사결정 과정을 되짚어보았고, 반성을 해보았다. 뒤늦은 숙고의 과정을 거치며 다시 살아내기 중인 이 글쓰기가 끝나고 주말이 되면 몇 시간을 운전하여 아내와 아이가 있는 집 문을 열고 들어갈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더 큰 부담을 가지고. 한 주 동안 더욱 성장했을 아이에게 최선의 것을 선사하기 위해.


Acknowledgments

This Study was conducted by research funds from Gwangju University in 2022.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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